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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
| 사상을 바탕으로 국왕 중심의 |
| 집권 체제와 관료 중심의 신권 |
| 체제가 서로 조화와 갈등을 |
|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해갔다. |
| 관료들은 유교에서 규정한 성 |
| 군이 되기를 왕에게 요구함과 |
| 동시에 고대의 성군들이 거처 |
| 했다는 건물처럼 궁궐도 검소 |
| 하고 질박한 건물을 짓도록 |
| 왕에게 요구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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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설계를 담당한 정도전은 중국 고대의
이상 국가로 유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하, 은, 주나라 |
| 3대의 정치를 이상적인 것을 여겼던 만큼
주나라의 궁궐 건축에 대한 제도를 이상형으로 받아들였던 |
| 것 같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명시되어
있는 국도(國都)의 구성 원리에는 전조후시(前朝後市), |
| 좌묘우사 (左廟右社)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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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궁궐의 구성 원리로는 전조후침(前朝後寢)과
오문삼조(五門三朝)가 있다 이러한 제도적 규정은 |
| 주대(周代) 이후 중국의 도성 및 궁궐의
계획에도 기본적 구성 원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어겨서는 |
| 안될 규범적 법칙으로서 적용되었다기 보다는
이상적인 규범으로서,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
| 왕의 권력과 국가의 규모가 방대해짐에 따라
새로운 도성 제도와 궁실 제도가 생겨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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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맨 처음 만들어진 경복궁을 보면
도성의 한복판에 있지 않고 북서쪽에 치우쳐있으며 남향으 |
| 로 배치되어 있다. 궁성 남쪽의 큰 길
좌우에는 의정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을 배치하였 |
| 고, 그 남쪽 동서로 뚫린 큰 길(지금의
종로)에 시장을 열어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을 각각 |
| 경복궁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았으나 등간격으로
대칭적으로 배치하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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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외성을 평지에
쌓지 않고 한성 분지를 외호하는 백악산, 응봉, 인왕산, 타락산 |
| 목멱산의 등성이에 산성 형식으로 지형에
맞게 쌓았다. 우리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과 공통 |
| 점이 많기는 하지만 중국의 제도를 변형해서
나름대로 독창적이고 지형을 존중하며 자기 필요에 맞는 |
| 모습을 지닌 우수한 문화를 창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궁궐
주변의 산
외사산
마을이나 도시를 한걸음 물러선
외곽에서 감싸주는 산들을 조산(祖 山)이라
함, 조산 가운데 마을이나 도시를
사방에서 감싸주고 있는 뚜렷한 네
개의 산을 말하며 이를 외사산(外四山)이라고
한다.
북: 북한산, 남:관악산, 동:용마산(아차산),
서:덕양산
내사산
조산에서 갈라져 나온 바로
뒷산을 주산(主山)이라고 하며 안쪽의
네 개의 산을 말한다.
북:백악, 남:목면산, 동:타락산, 서:
인왕산
* 북쪽의 산을 후현무,
* 바라보는 앞산을 안산(案山),전주작,
* 주산의 좌측-동편에 있는 산을
좌청룡, 우측-서편에 우백호
남쪽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동서남북을 말함. 남쪽을
바라보고 뒤는 북쪽,
앞은 남쪽, 오른쪽은
서쪽, 왼쪽은 동쪽이 된다.
도성
사대문의
이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붙여 이름지음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북대문: 숙정문(肅靖門)
靖(꾀정)자 智자와 뜻이 같다.
중앙: 보신각(普信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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