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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정과 반도지

불로문 앞을 지나 후원의 안쪽으로 접어들면 왼쪽 꺾인 곳에 연못과 연못가의 정자를 만나게 되니 이것이 반도지라 부르는 연못이고 정자가 관람정이다. 이 반도지는 그 모양이 한반도와 모양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나쁜 의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래의 연못모양은 "동궐도형"에서 보면 크고 작은 원형이 3개가 한곳에 모여든 마치 호리병과 같은 모습이었고 또 동궐도에는 아예 이 지역에 연못이나 정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도지의 배치가 북쪽 함경도쪽을 남쪽에 놓고 남쪽 경상 전라도 지역이 북쪽에 오도록 한 것으로 보아 고종때 호리병 모양의 연못을 의도적으로 고친 일본인들의 속셈을 알 수 있다.  곧 일본인들이 반도지를 만든 것은 한국의 옛 광대하였던 만주 일대의 고구려 땅 등을 관심 밖으로 하기 위해 한반도를 강조하면서도 거꾸로 뒤집어 좋아 저주하고자 한 것이다. 이연목의 가장자리에는 관람정이 서 있다. 그 평면이 부채꼴이기 때문에 [궁궐지]에는 "선자정"이라기록되어 있다..6개의 초석 위에 단면이 동근 기중을 세웠는데 4개의 기둥은 연못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현재 까지로는 평면이 부채꼴 모양인 정자로는 이 관람정 하나 뿐이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동궐도형에 호리병 모양의 연못가에 부채꼴 모양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고종때 만들어진 것이고 연못만은 일본인들이 고친 것이라 추정된다.

관람정 기둥에도 주련 들이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구슬 발 비단 기둥에 황곡이 에워싸고

비단 닻줄, 상아 돛대에 백구가 날아가네

원앙새 조용히 은당수를 쪼으고

새끼 제비 시원스레 전우의 바람에 날으네

무지개 다리 돌아서 비단 전각에 닿았고 그림배 물에 뜨니 봉래산에 가깝네.


승재정

 
관람정 남쪽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관람정을 내려다볼 수 있다. 장대석을 두벌대로 쌓은 정방형 기단 위에 팔모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두리 기둥을 세워 익공을 놓아 결구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연경당의 농수정 처럼 중앙에 절병통을 놓았다. 사방에 궁창부가 이층으로 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놓고 네짝 완자살 무늬의 문짝들을 달았는데, 두 짝씩 접어 들쇠에 매다는 들어 열개로 하였다.
승재정 주련의 한시는 다음과 같다

  

태액지 못가에서 옥술잔 보내고

파향전 전각 위에 붉은 연 머물도다

천 그루 나무에는 용과 뱀이 휘감긴 듯

백 갈래 샘물은 패옥이 울리는 듯


존덕정과 연지

  
관람정을 지나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육모정 정자인 존덕정과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의 물이 차서 넘치면 개천으로 흘러서 관람정 정자 앞 연못인 반도지로 흘러 들게 된다. 도랑에는 홍예를 튼 아름다운 돌다리가 있다. 다리의 엄지 기둥에 법수를 놓고 난간 두벌대는 하엽으로 받치고 궁창부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이 돌다리를 건너기 전 양쪽에는 석함이 좌우에 하나씩 놓여있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키가 높은 석물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해시계를 받치는 "일영대"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위에 괴석을 담았던 석함을 받치는 대석인 것을 [조선고적도보]10권의 사진으로 알 수

있다.
연못과 개천의 가장자리는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로 하여 궁궐후원의 못과 개천답게 정교하고도 정갈한 맛을 주고 있다. 이 연못가의 정자 존덕정도 후원의 그 어느 정자보다 화사하고 정교하다. 천장은 꽃살 교창과 그 아래 낙양각과 더불어 용상위의 '보개천장고'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어 아주 화려하다. 지붕은 처마에 잇대어 따로 하나 더 만들었기 때문에 그 아래는 개방된 툇간이 되면서 집 전체는 지붕이 겹친 이층 지붕을 이루고 있다. 동궐도에는 이층 지붕 모양의 정자가 있으나 이름은 없고 또 그 앞쪽에는 단지 네모난 연못만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와 같이 정자와 연못들이 이루어진 것은 "동궐도형"을 통하여 볼 때 고종때 만들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폄우사


존덕정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장대석을 한벌대로 두른 낮은 기단 위에 네모 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익공을 놓아 결구한 초익공 집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쪽 박공에 풍관을 달았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방에는 띠살 창호를 달았으나 마루에는 정면과 옆면은 창호 없이 개방하였고 평난간을 두었다. 전면에는 폭이 좁은 툇 마루를 달아 밖에서 디딤돌을 딛고 손쉽게 방이나 마루에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이집은 "동궐도"나 "동궐도형" 모두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827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인조22년(1644)육모정을 짓고 뒷날 이를 존덕정이라 고쳐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또 존덕정과 더불어 이 집이 다 함께"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입증된다. 이곳에 있는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풀 꽃다우니 수뀡이 졸고 있고

성근 솔 물에 가리니 생황이 연주되네

숲 아래 물소리는 왁자하니 웃음소리

바위 사이 나뭇빛은 은은한 방안이네

화각의 실바람은 버들까지 스쳐가고

은당의 물굽이는 이끼 반쯤 머금었네


취규정

 
이 정자는 인조 18년(1640)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동궐도"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이 옳다고 본다. 정면3간 측면 1간 단층 팔작집으로 장대석 한벌대로 된 낮은 기단 위에 네모 뿔대의 운두가 낮은 다듬은 초석을 두르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민도리집 이다. 처마도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고 평면은 모두 마루를 깔고 사면 모두 창호와 벽체 없이 개방하였는데 단지 삼면에만 평난간을 두른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정자는 존덕정으로 부터 비교적 가파른 언덕 오솔길을 따라 고개 넘어 옥류천으로 부터 산마루에 올라와서 쉽게 쉴 수 있는 곳으로 마련하였다.


청심정


이 정자는 존덕정 골짜기와 연경당 뒤쪽 골짜기 사이에 있는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숙종 14년(1688)에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또 남쪽 뜰에 돌을 파서 빙옥지를 만들었고 동쪽 좁은 골짜기와의 사이에 홍예교를 쌓아 왕래하였다고 하나 오늘날은 빙옥지만 있고 홍예교는 없다. 정면 1간 측면 1간의 사모정으로 한벌대 기단 위에 12각형으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가는 두리 기둥을 세워 굴도리로 결구한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사모지붕으로 중앙에 절병통을 놓아 마무리하였다.

정자는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언덕 아래를 굽어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정면에 돌계단을 두어 마루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면에 평난간을 둘렀는데 석계있는 정면의 중간만 난간을 두르지 않았다.정자정면 조금 떨어진 곳의 장방형 석지에는 거북이 한 마리를 놓아 정자를 바라보게 하였고 빙옥지라 새겨 놓았다. 정자이름 '청심정'과 걸맞게 서쪽 골짜기에 있는 빙천과도 잘 연계된다고 하겠다.
청심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앞에 늘어선 솔은 천겹이나 푸르르고

물 가운데 찍힌 달은 한 알의 진주일레

암혈의 계수나무 이슬은 선인장의 이슬이요

밭두둑에 핀 난초꽃은 옥병의 얼음일레 


빙천

 
빙천은 어쩌면 후원 안에서 가장 추운 곳인 듯하다. 연경당 서쪽에서 북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왼쪽의 골짜기로 접어든 한적한 골짜기에 빙천이 있다. 이 골짜기는 무더운 한 여름에도 양쪽언덕 위의 우거진 나무 숲에 햇볕이 가려 그늘을 만들므로 그 어느 곳보다도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골짜기 높고 낮음과 천연의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다만 꼭 필요한 몇 곳에만 인공을 가하였다. 후원의  어느 곳 보다도 자연스런 모습을 이루고 있다.

물을 모아 흘러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리는 가장 낮은 터에까지 몇 개의단으로 나누었다. 냇물이 일단 석루조를 통하여 한 단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 이곳 천연의 넓적한 바위에 흠을 파서 일단 그곳에서 물을 모았다가 다시 아랫단으로 흘러보내게 하였다. 이런 수법은 옥류천의 물굽이와 작은 폭포를 만든 수법이나 또는 경복궁 향원정 샘터에서의 수법들과 모두 일맥 상통한다.그리고 이곳 빙천의 냇물이나 이 골짜기에 흘러내리는 물들은 작은 냇물을 이루어 연경당 서쪽 행랑 마당 밑을 통과하여, 행랑채 밑으로 흘러나와 연경당 장락문 앞으로 흐르고 있다.


옥류천과 그 주변


존덕정으로 부터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산등성이에 오르면 시원한 북쪽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낮은 북쪽 계곡에 이르는 또 하나의 오솔길을 돌아 들어서면 정자와 만난다.

그 첫 번째 만나는 정자가 취한정인데, 정자 앞쪽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안쪽에 몇 채의 정자들이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취한정은 동궐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1827년 이전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정자는 임금님이 옥류천 어정에서 약수를 들고 다시 돌아 나올때 쉴 수 있게끔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취한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온뜨락의 꽃그림자는 봄 밤에 머문 달이요

정원 가득한 솔 소리는 밤에 듣는 파도일레

구천의 이슬 고여 금반에 무겁고

오색구름 드리워 푸른 일산에 엉기었네

화려한 부채 처음 펄쳐 옥좌로 옮기고

꽃등 번갈아 들어 주진에 비치네

천자 어가는 아득히 천문 버들길로 나오고

각도에서 머리 돌려 상림원의 꽃 보누나

이슬 젖은 복숭아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하늘 높이 나는 학떼 들에게 빌려 주리.

물에 스치는 버들개지 천 만 점네.


소요정, 청의정


취한정 위쪽 옥류천 가에는 또 다른 정자인 소요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인조 14년(1636)에 건립되었다. 본래 이름은 환서정 이라 하였는데, 뒷 날 소요정 으로 고쳤다 한다. 특히 이 정자에서는 옥류천과 소요암 폭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심산 계곡의 흥취를 만끽할 수 있다.
소요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온 궁원꽃이 피니 봄날이 길고

팔당이 일없으니 소서가 드물 도다

이슬 기운은 새벽에 청계궁 달과 연했고

패옥소리 아스라히 자미천에 들려오네.

소요정 과 취한정 앞쪽을 흐르는 옥류천은 북악산 동쪽산줄기의 하나인 응봉 산록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류와 어정을 파서 흘러나오는 물로 작은 시내가 되어 흐르게 하였다. 특히 어정 옆 본래부터 있던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 앞쪽에는 물이 돌아 흐르게 둥그런 홈을 팠으며, 돌아 흐른 물은 다시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이것을 만든 때는 인조 14년(1636)이다. 바위에는 옥류천 이라고 인조임금이 쓴 글씨를 새겨 놓았고 또한 숙종의 시를 1670년에 새겨 놓았는데, 이시를 풀이하면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길은 300자나 되고 저 높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네/ 이를 보노라면 흰 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 번개를 치네" 라는 뜻이 된다.

어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옥류천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는데 이 다리 아래 물 속에는 작은 디딤돌 하나와 돌확이 하나 있다. 돌확은 네모났는데 가운데 물 괴는 곳은 둥근 원형으로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디딤돌은 닫고 이 돌확에 가득찬 물로 손을 씻으면 그 시원한 맛은 한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준다.
 

어정은 돌난간을 두르고 정갈하게 꾸몄는데 "동궐도"에는 옥류천과 오언시만 있고 어정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동궐도형"에도 어정은 보이지 않고 이 먼 거리에 못으로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떄 분명 고종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어정 안쪽으로 청의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궁궐 안에서 초가 지붕을 한 오직 하나뿐인 특이한 정자이다.
 

정자의 꾸밈새는 지붕 아래는 극히 아기자기하여 공예적이고 또 단청을 하여 화사하기 그지없는데 지붕만은 초가로 하여 소박하기 그지없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임금님은 이 정자 앞쪽에 만든 논에 손수 모를 내어 벼를 심고 또  그 수확으로 얻은 볏짚으로 이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여 농사의 막중함을 행동으로써,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청의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신선 이슬은 길이 요초에 엉켜 푸르르고

채색 구름은 깊은 숲에 머물러 오래 배회하네


태극정, 농산정


청의정 북쪽 바로 옆에는 태극정과 용산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두 정이 골짜기의 마지막 정자들이다. 태극정은 인조 14년(1636)에 처음 세웠는데 처음에는 운영정이라 하였다. 장대석 세벌대 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벌대의 기단을 만들고 이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 기둥을 세워 굴도리로 결구한 정면1간 측면1간의 겹처마 사모정이다.

지붕 가운데에는 절병통을 놓아 마무리하였고 바닥 기둥 밖으로는 아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둘렀다 

태극정 아래쪽의 농산정은 정면 5간, 측면 1간의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룬 특이한 정자인데 2간이 대청이고 2간이 온돌방 1간이 부엌으로 되어있다. 이정자의 용도는 임금께서 청의정을 비롯한 옥류천 지역에 나왔을 때 다과상 등을 마련하던 곳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집 모양도 일반 행랑채 모양으로 소박하게 구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벌대 낮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태극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창을 통해 보니 운무는 옷 위에서 피어나고

휘장 거두니 산천은 거울 속에 들어오네

버들가 새벽 누각에 꾀꼬리 소리 들여오고

꽃속의 비 갠 처마 끝에 제비가 날으네


신선원전-대보단

신선원전은 1927년 일제가 원래의 선원전에 있던 왕들의 어진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지금 신선원전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는 대보단이 있었다. 대보단이란 임진왜란 당시 군대를 보내어 우리를 도운 명나라의 의종과 마지막 왕 신종 그리고 명을 세운 태조에게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제사를 지내던 단이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의 감시가 날카롭던 시절에는 세우지 못하다가 창나라의 간섭이 한 풀 꺾이고 정신적으로도 우리가 중국의 문화적인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소중화 의식이 자리잡는 등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커가던 숙종이 주도하여 세웠다. 하지만 공개적인 장소에 세우면 청과의 외교적 마찰이 심각하겠기에 청의 사신이 접근할 수 없는 곳 궁궐의 뒷편 후미진 자리에 세웠다. 일제는 조선 왕실의 정신적 자주를 능멸하는 동시에 중국으로 향하던 의식을 차단하고 일본의 종주권을 확실하게 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려서 이 자리에 선원전을 옮긴 것이다.